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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A

그래피티의 50년사, 필라델피아의 한 소년에서 글로벌 미술관까지

GRAFFITI ROOTS

Wall Writing

WRITERS ON
THE WALL

한 소년이 벽에 자기 이름을 쓴 그 순간이 전 세계 도시의 시각 언어를 바꿔놓았다.

그래피티는 힙합의 네 가지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디제잉, MC, 브레이킹과 함께 1970년대 뉴욕의 거리에서 발화한 이 시각 표현 양식은 한 도시의 문제로 시작해 50년 만에 전 세계 미술관의 전시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그래피티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진화했으며, 어떻게 현재의 위상에 도달했는지를 추적한다.

그래피티의 역사를 추적할 때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실은 그것의 출발점이 뉴욕이 아니라 필라델피아였다는 점이다. 대중적 인식과 실제 역사 사이의 이 간극을 메우는 것에서 그래피티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정시설에서 콘브레드

필라델피아의 코너에서 시작된 일

1965년 필라델피아 청소년 교정시설 YDC에 수감되어 있던 12세 소년 Darryl McCray는 식당 요리사에게 자신의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옥수수 빵을 만들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요리사는 그를 시설 상담사 앞으로 끌고 가 이 녀석에게 콘브레드라는 별명을 붙여달라고 했다.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한 McCray는 시설 안 벽에 자신의 새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출소 후 McCray는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본격적으로 자기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이름을 알리는 것을 넘어 한 가지 구체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같은 동네에 살던 Cynthia라는 소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McCray는 그녀의 동네와 그녀가 등교할 때 타는 버스 노선을 따라 Cornbread Loves Cynthia라는 문구를 반복적으로 그렸다. 이 개인적 표현은 결과적으로 도시 전체의 시각 풍경을 바꿨다.

미디어의 역할

1971년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이 콘브레드가 갱단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잘못 보도했다. 살아 있는 McCray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동물원에 잠입해 코끼리 옆구리에 자기 이름을 그렸다. 이 사건은 다시 신문에 보도되었고, 그래피티는 단순한 낙서가 아닌 미디어와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표현 양식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위키피디아의 콘브레드 항목은 그를 현대 그래피티의 시조로 명시하고 있으며, 그의 활동이 어떻게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확산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1971년 7월 25일 뉴욕 타임즈는 필라델피아를 세계 그래피티의 수도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그래피티의 무게중심이 뉴욕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같은 해 7월 뉴욕 타임즈는 또 다른 기사에서 TAKI 183이라는 인물을 다뤘다. 맨해튼의 그리스계 청년 Demetrius가 자신의 닉네임과 거주지 거리 번호를 결합해 만든 이 태그는 뉴욕 전역의 지하철과 공공시설에 등장했고, 이 한 편의 기사가 뉴욕 청소년들에게 자신만의 태그를 만드는 폭발적 유행을 촉발했다.

지하철 시대: 1970년대 중후반

1970년대 중반의 뉴욕 그래피티 신은 지하철이 핵심 무대였다. 그래피티 라이터들에게 지하철은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움직이는 갤러리였다. 한 차량에 그린 작품은 그날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며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보였고, 라이터의 이름은 그 차량과 함께 도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신을 정의한 것은 두 부류의 분화였다. 한쪽에는 빨리 많은 곳에 자기 이름을 남기는 게터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작품의 시각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스타일 라이터가 있었다.

스타일의 진화

초기의 단순한 태그는 점점 더 정교한 형태로 진화했다. 1972년경 등장한 버블 레터는 글자에 부피감을 주는 첫 번째 양식이었다. 1973년경 등장한 와일드스타일은 글자들을 화살표와 같은 장식 요소로 연결해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었다. 1974년경에는 한 명의 라이터가 차량 한 칸 전체를 덮는 홀카 작업이 등장했고, 1976년에는 캐릭터와 풍경 묘사가 결합된 마스터피스가 표준이 되었다.

이 시기 활동했던 Phase 2, Tracy 168, Lee Quinones, Dondi 같은 이름들은 그래피티 역사의 첫 번째 거장 세대로 기록된다. 그들의 작업은 단지 자기 이름을 쓰는 행위를 넘어 글자 자체의 조형 가능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미술 운동이었다. 1980년대 초 Henry Chalfant와 Martha Cooper가 출간한 사진집 Subway Art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시각 자료로 보존한 첫 번째 대규모 시도였고, 이 책은 이후 30년 동안 전 세계 그래피티 라이터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반그래피티 정책과 변화

뉴욕시는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반그래피티 정책을 시행했다. Ed Koch 시장 시절인 1980년대 초 뉴욕시 교통국은 지하철 차량에 그려진 모든 그래피티를 발견 즉시 지워버리는 무관용 정책을 도입했다. 라이터들의 작품이 도시 전체를 돌기도 전에 차고에서 지워지는 상황이 되자 지하철은 점차 그래피티의 무대로서 매력을 잃었다.

1989년 뉴욕시 교통국은 그래피티가 그려진 차량을 영업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마침내 완성했다. 같은 해 마지막 그래피티 차량이 운행에서 제외되었고, 뉴욕 지하철 그래피티의 한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래피티 자체의 종료가 아니라 그래피티의 무대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1990년대 들어 라이터들은 지하철 대신 도시 곳곳의 벽과 트럭, 그리고 보다 합법적인 형태인 위촉 벽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갤러리 진입과 미술계의 변화

1980년대 초 뉴욕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지하철의 그래피티 라이터들 중 일부가 갤러리 아티스트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 P.S.1 미술관에서 열린 Times Square Show를 시작으로, 1981년 Fashion Moda 갤러리, 1982년 Mudd Club 등에서 그래피티 라이터들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전시되었다. Jean-Michel Basquiat과 Keith Haring 같은 인물들은 이 시기 그래피티 신과 컨템포러리 아트계를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Basquiat과 SAMO

Basquiat은 1977년부터 친구 Al Diaz와 함께 SAMO라는 태그를 맨해튼 다운타운에 그리기 시작했다. SAMO는 Same Old Shit의 약자였으며, 일반적인 그래피티와 달리 시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짧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SAMO IS A WAY OUT, SAMO AS AN END TO MINDWASH RELIGION 같은 문구들은 1970년대 후반 다운타운 뉴욕의 지식인 공동체에서 의미 있는 화제가 되었다. Basquiat이 1981년 SAMO 활동을 종료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갤러리 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가 가져간 것은 단지 그래피티의 기술이 아니라 그래피티가 만든 거리의 정통성이었다.

Keith Haring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그는 뉴욕 지하철의 빈 광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 작업은 곧 갤러리와 미술관으로 확장되었다. Basquiat과 Haring의 사례는 그래피티가 거리에서 만들어진 미학이 어떻게 제도권 미술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첫 번째 모델이 되었다.

글로벌 확산과 Banksy 시대

1990년대 들어 그래피티는 본격적으로 미국 밖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출간된 Subway Art와 같은 시기 제작된 영화 Wild Style이 유럽과 아시아 청소년들에게 도달하면서, 그래피티는 더 이상 뉴욕의 지역 현상이 아닌 글로벌 청년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베를린, 파리, 런던, 도쿄, 상파울루 같은 도시들이 각자의 그래피티 신을 발전시켰고,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고유한 양식들이 등장했다.

스텐실과 익명성

1990년대 후반 영국 브리스톨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Banksy는 그래피티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그는 전통적인 스프레이 페인팅 대신 스텐실 기법을 사용해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를 거리에 빠르게 남기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스텐실은 짧은 시간 안에 정교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그래피티가 단순한 글자 쓰기를 넘어 정치적 발언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Banksy의 또 다른 기여는 익명성의 새로운 정의였다. 1970년대의 그래피티 라이터들이 자신의 태그를 통해 명성을 추구했다면, Banksy는 신원을 완전히 숨기는 방식으로 오히려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역설적 전략은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 정치와 맞물려 그래피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미술관과 거리의 공존

오늘날 그래피티는 거리와 미술관 양쪽에 동시에 존재한다. 스미소니언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의 힙합 컬렉션 페이지는 뉴욕 지하철 차량의 그래피티 도어를 비롯해 그래피티 관련 유물들을 공식적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그래피티가 미국 시각문화사의 정식 항목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거리에서는 매일 새로운 그래피티가 그려지고 또 지워지는 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제도권 진입은 그래피티 신 내부에 항상 긴장을 만들어왔다. 일부 라이터들은 갤러리와 미술관 진입을 그래피티의 정신적 변질로 비판한다. 거리의 자발성과 무허가성, 그리고 일시성이 그래피티의 본질인데, 그것이 미술관에 박제되는 순간 본질이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다른 라이터들은 제도권 진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 양식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두 입장 사이의 긴장은 그래피티 컬처의 영원한 내부 논쟁이다.

WRITER’S TRUTH

그래피티는 보존되지 않을 때 가장 그래피티답다. 한 작품이 일주일 만에 지워지고 다른 작품으로 덮이는 순환 그 자체가 이 양식의 본질이다. 거리에서 만들어진 미학은 거리에서 지워지는 것까지 포함해서 완성된다. 박제는 그것의 한 가지 운명일 뿐이다.

한국의 그래피티 신

한국에서 본격적인 그래피티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미군 기지 인근 지역과 홍대 일대에서 처음 등장한 한국 그래피티 신은 2000년대 들어 자체적인 라이터 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JNJ Crew, RIM, XEVA 같은 한국 라이터들이 국제 그래피티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한국 그래피티는 글로벌 신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한국 그래피티 신의 한 가지 특징은 한글 문자 그래피티의 발전이다. 알파벳 기반 그래피티 양식을 한글에 적용하는 시도는 여러 라이터들에 의해 진행되어왔으며, 이는 한글 글자 구조의 특성상 알파벳과는 다른 시각 효과를 만들어낸다. 한글 그래피티는 아직 글로벌 신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있지만, 한국 시각문화의 고유한 표현 양식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거리에서 시작된 시각 언어가 한 시대를 정의하는 방식은 낯선 공간에서 작동하는 언리튼 룰이 한 도시의 밤 문화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과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를 따른다.

그래피티의 다음 50년

그래피티의 다음 시대는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거리의 무허가 활동이 여전히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의 라이터들이 디지털 도구와 결합한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그래피티가 도시 행정의 공식 프로그램에 통합되어 합법적 벽화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의 Mural Arts Program은 1980년대 이후 4000개 이상의 합법 벽화를 도시 곳곳에 만들어왔으며, 이 프로그램에 콘브레드 본인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피티의 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래피티가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시의 표면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거기에 자기 이름을 남기려 할 것이다. 콘브레드가 1965년 시설 벽에 처음 자기 이름을 썼을 때 시작된 충동은 다음 50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자기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려는 인간의 욕구는 그래피티라는 양식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그 양식이 사라진 후에도 다른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세로 스크롤 위에 펼쳐지는 새로운 스트리트 내러티브의 등장을 다룬 웹툰과 힙합의 만남에서 본 것처럼, 거리에서 시작된 모든 양식은 결국 글로벌 컬처의 일부가 된다. 그래피티는 그 첫 번째 사례였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세대에 의해 다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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